김동규
2022.08.18
오병탁 작가의 작업실은 양평군 개군면. 산골짜기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대중교통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지역인지라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가야 했다. 며칠 전부터 미친듯이 쏟아지던 비는 자동차의 온 몸을 두드려대고 있다. 차 앞유리를 발작하듯 닦아대는 와이퍼의 허리가 오도독, 부러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전국은 물난리. 아닌게 아니라 도로 옆을 나란히 달리는 남한강의 수위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있었고 강 표면은 온갖데서 쓸려나온 쓰레기들로 코팅되다시피 덮여있었으며 그 쓰레기 위로 또 비가 퍼붓고 있다. 이런 말 외람되지만 참으로 장관이었다. 남한강을 뒤로하고 산길로 들어서니, 이번엔 도로 위로 산사태가 나있다. 산이 평평하게 쏟아진 꼴, 난생 처음 보았다. 낙석으로 깨져나간 아스팔트 아래로 흙바닥이 보이고,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낸 채 드러누워있다. 지역 주민들과 공무원들이 땅 위로 넓게 펼쳐진 저 산을 수습하느라 분주하고 폭우는 역시나 아랑곳없이 그네들의 정수리를 두드린다. ‘그래, 다 해라 다 해!’, 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차를 달리다보니 오병탁 작가의 작업실. 문 두드리니 세상 태평한 얼굴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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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 한 잔 마시고, 한쪽 벽에 도열해있는 페인팅들을 들여다본다. 작가는 조심스레 작품들의 첫 인상을 묻고, 나는 ‘무섭다’ 대답했다. 그것이 적절한 표현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무서움’보다는 ‘무기력함’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엉망진창으로 엎어지고 겹쳐지고 까뒤집어지고 짓뭉개진, 사연을 추적할 길이 없는 범행 현장 앞에 서있는 삼류 사설 탐정이 느낄 법 한 속수무책의 무기력함이랄까. 탐정이 무기력한 이유는, 눈 앞의 (시각적) 근거들 속에서 유의미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화면 좌상단의 붉은 붓터치들과 그 하단의 뭉글뭉글한 표면 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화면 중앙의 다급한 필치와 그 우측의 질감이 미묘하게 겹쳐져야 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없다.
화면 하단의 수평선들이 자아내는 공간감을 난폭하게 덮어버리는 저 색면의 의미가 불가해하다.
흩뿌린 물감이 점유한 공간을 종횡무진으로 긁어낸 나이프 자국의 사정을 알아낼 수 없다.
다만 필치에서 느껴지는 것은 ①다급함과 ②정교함이었다.
그가 ①다급한 이유는, ‘이 세상에 그림이 되지 못하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그것의 ‘양적 확장’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 세상은 거의 무한대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무한대의 사건들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무덤덤한 환등기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을 그림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 사람은, 거의 무한대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무한대의 사건들을 끊임없이 그려내야 하는 ‘인간 환등기’ 그 자체일 수 있다. ‘양적 확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환등기의 필치가 다급해진다.
허나 그는 이내 ②정교해진다. 양적 확장을 달성하고자하지만, 세상이 내비치는 풍경들 전부를 ‘차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한대의 시공간, 무한대의 사건은 커녕 그가 드로잉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1/∞에 가까운 세상의 편린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페인팅을 통해 이 편린들, 그러니까 드로잉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하고 한시적인 특이성을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의 캔버스 화면 위에 여러 점의 드로잉들을 정교하게 뒤섞는데, 그 과정을 통해 개별적인 드로잉이 가지고있던 구체적인 맥락은 휘발되고 각 드로잉의 파편들만이 화면 상에서 난맥을 일구게 된다. 그리하여 특수하고 유일무이한 편린이었던 어떤 드로잉적 사건은, 거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회화적 사건이 되고, 특정 사건의 증거로써의 효력을 잃은 파편화된 시각적 근거들만이 부유하는 그 화면은 조심스레 ‘모든 사건’을 지시-혹은 환기-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류가 개념적인 수위에서 접근하는 것과는 좀 다른, 리얼리티를 그 근간으로 하는 어떤 절대적인 화면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공간이 하나의 시간 위로 엎어지고 그 시간은 또다른 공간 아래 파묻힌다. 모든 사건이 모든 사건 위로 겹쳐지며 그 특이성을 상실해간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산사태, 혹은 모의(模擬) 물난리와도 같다. 흙바닥이라는 특이점을 뒤덮고 있는 아스팔트라는 특이점을 낙석이라는 특이점이 때려부순다. 낙석이라는 특이점을 치워버리는 일에 골몰해있는 공무원이라는 특이점의 특이한 머리통을 폭우라는 특이점이 적셔갈 때, 그의 그림은 예외없이 무자비하고 무차별하게 그 이후에 도래할 레이어에 뒤덮힐 준비를 하고 있다. 그것이, 이 화가가 다급합과 정교함으로 자아내는 질서정연한 무질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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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가는 길, 양평에 올 때와 반대편에서 바라본 산사태와 물난리의 풍경은 묘하게 한적하고 평평해보였다. 그런 풍경을 느릿한 눈으로 훑어보다보니 문득, 왜 그의 그림이 무서워보였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나같은 건 지금 죽어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상투적이고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진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난 쉽게 죽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세계와 회화가 일으키는 화학반응에는 확실히 좀 기묘한 데가 있다.